서촌 | 카페 알베르게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환경에 적응하느냐다. 선생님이 된 친구와 글을 쓰는 내가 조금 다른 세상에 살면서 다른 습관을 익힌 것처럼. 퇴근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 등 개인의 삶에는 무수한 가능성이 있다. 세상엔 어떤 선택지가 더 있을까. 무엇보다, 나는 어떤 환경을 선택해서 적응하고 싶은 걸까. 당장 직장을 바꾸지 않더라도, 여행을 떠나면 의외의 발견을 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내가 여행할 거라고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독립서적, 독립여행에서 이어집니다.

경복궁역 대림미술관에서 건너편으로 조금만 발자국을 내다 보면, 서촌의 끝 옥인동을 발견하게 된다. 기와집과 자기 공방, 갤러리가 곳곳에 숨겨져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와 예술적 감각이 잘 어우러진 동네다. 이렇게 같은 서울을 걸어도 동네마다 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걸 평소엔 느끼기 어렵다.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걸어도 여행은 시작된다.

카페 알베르게는 서촌의 옛 건물들 사이에서 눈에 확 띄는 외관을 가졌다. 선명한 노란색과 은은한 분홍색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스페인에서 자주 사용하는 색이라는 정세미 대표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이미 다른 공간에 온 듯했다.
내부도 독특했다. 스페인 가정집의 분위기를 재현한 1층엔 식물문양의 곡선 패턴이 들어가 있는 의자가 눈길을 끌고, 유려한 곡선으로 디자인된 테이블의 다리도 신선했다. 벽지나 바닥 타일의 무늬 역시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외벽을 그대로 드러낸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나, 심플함을 강조하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에 익숙해진 눈에 이채로움을 주는 콘셉트다. 실제로 스페인 손님이 방문해서 가정집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했다는 피드백을 주고 갔다고.



반면 2층은 갤러리와 서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들을 쭉 둘러봤다. 그 중 순례길의 길목마다 놓여져 있다는 노란 화살표가 인상적이었다. 화살표만 믿고 800km를 걸어가는 건 어떤 느낌일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20년간 계속 직장인으로 지내는 일이 막연한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얼마나 힘들지,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실제로 순례길을 걸을 당시 메고 다녔다는 백팩
순례길을 다녀온 정세미 대표에게 묻기로 했다. 어떻게 800km를 걸었느냐고. 조금만 멀어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나로서는 존경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도중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길을 걷는다고 뭐가 달라지기는 할까.
그는 걱정부터 하는 나를 보더니 자신이 발을 다쳤던 순간의 이야기를 꺼냈다. 2014년, 카페 알베르게를 어떤 공간으로 만들까 고민하며 남편과 함께 걷기 시작한 산티아고 순례길. 그는 출발한 지 3일 만에 발에 물집이 잡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물집이 곪은 것이다. 새끼발가락이 크게 부어 걷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숙소로 돌아가 일정을 멈춰야 했다. 이 광경을 보던 한 스페인 커플이 다가와 병원까지 동행해주겠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그렇게 병원으로 가던 중 마주친 다른 현지인 역시 자신도 그 방향으로 간다며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발에 물집 잡힌 동양인과 스페인 사람 7명이 대학병원 응급실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에겐 아픈 발이 나은 것보다 스페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베푼 친절이 더 고마웠다고.
의외의 대답이었다.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발에 물집이 잡혀도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게 순례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는 숙소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먹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혼자만 고민하던 문제가 풀리기도 했다고.

순례길을 걷다 지친 사람들의 쉼터, 숙소를 알베르게(Albergue)라고 부른다. 카페 알베르게 역시 긴 여정을 걷는 사람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돌아보고, 또 누군가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관점을 얻어갈 수도 있다. 어쩌면 순례길을 전혀 몰랐지만 카페를 들렀다가 다음 달에 훌쩍 떠났다는 누군가처럼 새로운 여행길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카페 알베르게에 방문한다는 건 공간을 만나는 일이자 동시에 사람을 만나는 일 아닐까. 순례길을 다녀온 부부가 있는 공간.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공간. 먼 길을 걷다가 지친 순간 카페 알베르게가 떠오를 것 같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기대하면서.

그래서 다음 여행은 더 구불구불하고 더 많은 계단이 있는 동네로 떠나려 한다. 그곳에선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다음편에 계속).
INFORMATION
010-6289-1424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53-30
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
사진제공 카페 알베르게
서촌 | 카페 알베르게
*독립서적, 독립여행에서 이어집니다.
경복궁역 대림미술관에서 건너편으로 조금만 발자국을 내다 보면, 서촌의 끝 옥인동을 발견하게 된다. 기와집과 자기 공방, 갤러리가 곳곳에 숨겨져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와 예술적 감각이 잘 어우러진 동네다. 이렇게 같은 서울을 걸어도 동네마다 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걸 평소엔 느끼기 어렵다.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걸어도 여행은 시작된다.
카페 알베르게는 서촌의 옛 건물들 사이에서 눈에 확 띄는 외관을 가졌다. 선명한 노란색과 은은한 분홍색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스페인에서 자주 사용하는 색이라는 정세미 대표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이미 다른 공간에 온 듯했다.
내부도 독특했다. 스페인 가정집의 분위기를 재현한 1층엔 식물문양의 곡선 패턴이 들어가 있는 의자가 눈길을 끌고, 유려한 곡선으로 디자인된 테이블의 다리도 신선했다. 벽지나 바닥 타일의 무늬 역시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외벽을 그대로 드러낸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나, 심플함을 강조하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에 익숙해진 눈에 이채로움을 주는 콘셉트다. 실제로 스페인 손님이 방문해서 가정집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했다는 피드백을 주고 갔다고.
반면 2층은 갤러리와 서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들을 쭉 둘러봤다. 그 중 순례길의 길목마다 놓여져 있다는 노란 화살표가 인상적이었다. 화살표만 믿고 800km를 걸어가는 건 어떤 느낌일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 20년간 계속 직장인으로 지내는 일이 막연한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얼마나 힘들지,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순례길을 다녀온 정세미 대표에게 묻기로 했다. 어떻게 800km를 걸었느냐고. 조금만 멀어도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나로서는 존경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도중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길을 걷는다고 뭐가 달라지기는 할까.
그는 걱정부터 하는 나를 보더니 자신이 발을 다쳤던 순간의 이야기를 꺼냈다. 2014년, 카페 알베르게를 어떤 공간으로 만들까 고민하며 남편과 함께 걷기 시작한 산티아고 순례길. 그는 출발한 지 3일 만에 발에 물집이 잡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물집이 곪은 것이다. 새끼발가락이 크게 부어 걷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숙소로 돌아가 일정을 멈춰야 했다. 이 광경을 보던 한 스페인 커플이 다가와 병원까지 동행해주겠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그렇게 병원으로 가던 중 마주친 다른 현지인 역시 자신도 그 방향으로 간다며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발에 물집 잡힌 동양인과 스페인 사람 7명이 대학병원 응급실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그에겐 아픈 발이 나은 것보다 스페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베푼 친절이 더 고마웠다고.
의외의 대답이었다.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발에 물집이 잡혀도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게 순례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는 숙소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먹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혼자만 고민하던 문제가 풀리기도 했다고.
순례길을 걷다 지친 사람들의 쉼터, 숙소를 알베르게(Albergue)라고 부른다. 카페 알베르게 역시 긴 여정을 걷는 사람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돌아보고, 또 누군가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관점을 얻어갈 수도 있다. 어쩌면 순례길을 전혀 몰랐지만 카페를 들렀다가 다음 달에 훌쩍 떠났다는 누군가처럼 새로운 여행길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카페 알베르게에 방문한다는 건 공간을 만나는 일이자 동시에 사람을 만나는 일 아닐까. 순례길을 다녀온 부부가 있는 공간.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고 싶은 사람이 있는 공간. 먼 길을 걷다가 지친 순간 카페 알베르게가 떠오를 것 같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기대하면서.
그래서 다음 여행은 더 구불구불하고 더 많은 계단이 있는 동네로 떠나려 한다. 그곳에선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다음편에 계속).
INFORMATION
010-6289-1424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 53-30
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
사진제공 카페 알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