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동 | 엠프티폴더스
초보자가 가장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능력 이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겨 일을 마무리하고 녹초가 되는 아마추어와 달리, 프로는 주어진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는 대신 일정한 퀄리티를 약속한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빨리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까지 막아지지는 않는 걸. 그렇게 무리하다 보면 처음 의도와는 반대로 리듬이 깨지고 마무리는 엉성해진다. 맥락 없는 발버둥에서 벗어나 나만의 리듬을 찾기 위해,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서울 속 부르클린 바이브에서 이어집니다.
‘독립서점’하면 떠오르는 책방지기의 큐레이션으로 빼곡히 채운 공간은 아니었다. 작은 규모임에도 표지를 볼 수 있게 세워놓은 책이 많은데다, 책장 한 칸의 높이도 다른 곳보다 높다. 가구도 마찬가지. 의자, 책장, 매대 모두 옆과 뒤가 비어있다. 채우고 눌러 담기에 급급한 내 모습과 대조됐다. 살짝 숨을 고르고 찬찬히 살펴봤다.

‘빈 폴더’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서점 엠프티폴더스 역시 행운동의 6개월 차 신입이다. 당연하게도 빈 폴더는 무언가 채워 넣고 싶을 때 만든다. 어쩌면 행운동도, 이 공간도 나처럼 잘하고 싶은 욕심으로 시작해서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과정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행운동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동네다. 맞은편 샤로수길이 북적이는 동안 조용한 주거단지에는 젊은 직장인 위주로 1인가구가 늘어나며 최근 작고 개성 있는 가게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어진 일을 하기보다 자신의 취향과 리듬에 맞게 일하려는 사람이 모인 것이다. 아직 상권이 크지 않고 무언가 만들어보는 단계라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간다.



다른 서점에서는 보기 힘든 제목들이 눈에 띈다. 내가 좋아하는 솔, 필름생활 안내서, 문단 아이돌론, 영화기록장 같은.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스크랩하고 나의 취향을 공부하는 이야기다. 그것을 책으로 엮든, 짧은 글에 담든, 노트에 기록하든. 관심 있는 것이 생기면 눈이 뻑뻑해지도록 검색하고 탐닉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이 공간을 만든 사람도 그런 캐릭터가 아닐까. 자세히 보니 소품 하나에도 개인적인 취향이 묻어있다.



이렇게 색깔이 선명한 공간을 만든 그는 어떤 리듬으로 일을 하는 걸까. 책방 업무는 얼핏 여유로워 보이지만 자잘한 일거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회계, 고객 응대, SNS 운영, 청소, 책 입고, 프로그램 기획, 하물며 포스터 제작까지, 전부 혼자 하려면 문제 없이 굴러가도록 유지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을 텐데.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일이 많을 때 가장 편한 선택은 업무시간을 늘리고 체력을 깎아서 어떻게든 해내는 것이니까. 자꾸만 무리해서 일을 완성시키는데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다.

김소정 대표는 ‘얼마 전 동생에게 책방을 맡기고 오픈 반년만에 처음 친구들과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아프다는 이유로 문을 닫은 적이 없던 건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은 프로그램 하나도 내가 기획한 일이고, 어떤 책을 입고할지 결정하는 일 역시 온전히 나의 선택과 책임이라고 생각하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됐다고.
정작 힘든 순간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일은 정말 힘들면 미룰 수 있지만 사람을 응대하는 건 미룰 수 없으니까. 친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다가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3-4시간씩 대화를 나누는 일이 벅찰 때도 있었다고. 유난히 손님이 많았던 하루의 퇴근길에는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마저 들기도 했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일의 리듬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어쩌면 이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감정의 양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관리하는 것. 기분이 곧 태도가 되기는 너무 쉽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료와의 소통이나, 일을 대하는 자세나, 충분히 마음을 쏟지 못해서 생기는 실수는 감정을 다치게 만들었다. 일을 그르친 것보다 회복하기 힘든 잘못이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감정 게이지가 떨어진 순간에는 어떻게 하냐고. 그는 손님이 되어 주변의 도서관이나 조그마한 가게를 찾아간다고 말했다. 특히 도서관은 모두가 책 자체를 여유롭게 즐기는 분위기가 있어 자연스레 빠져든다고. ‘내가 만들고 싶었던 분위기도 이런 거였지’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맴도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 그 감각이 스스로를 다잡고 일의 리듬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감정적으로 지쳐있을 때 무엇이든 잘 만들어진 것들을 보고 나면, 단순히 괜찮다는 위로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저렇게 하고 싶었어’라는 지향점이 뚜렷해지니까. 힘든 순간은 언제든지 찾아온다. 그럴수록 더 멋있게 해내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 처방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무실에서 들리는 전화벨 소리나 동료 간의 대화 같은 작은 소음에도 금방 몰입이 깨지는 스스로를 목격하곤 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연히 집중이 잘 되는 순간이 찾아와도 그것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리듬을 다시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그래서 몸이 힘든 순간에도 좋은 글을 읽고 좋은 공간을 의식적으로 찾아가 어떻게 만들었을지 관찰하고 음미하려고 한다. 생각해보면 오래 장사를 한 음식점일수록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움직인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 좋은 리듬이란 결국 그 태도가 분위기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것을 힘껏 좋아한다는 엠프티폴더스의 분위기를 즐겼던 순간도 후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언젠가 나의 리듬이 깨진 순간에(다음편에 계속).

INFORMATION
서울 관악구 행운1길 70 1호
instagram.com/emptyfolders
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
행운동 | 엠프티폴더스
*서울 속 부르클린 바이브에서 이어집니다.
‘독립서점’하면 떠오르는 책방지기의 큐레이션으로 빼곡히 채운 공간은 아니었다. 작은 규모임에도 표지를 볼 수 있게 세워놓은 책이 많은데다, 책장 한 칸의 높이도 다른 곳보다 높다. 가구도 마찬가지. 의자, 책장, 매대 모두 옆과 뒤가 비어있다. 채우고 눌러 담기에 급급한 내 모습과 대조됐다. 살짝 숨을 고르고 찬찬히 살펴봤다.
‘빈 폴더’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서점 엠프티폴더스 역시 행운동의 6개월 차 신입이다. 당연하게도 빈 폴더는 무언가 채워 넣고 싶을 때 만든다. 어쩌면 행운동도, 이 공간도 나처럼 잘하고 싶은 욕심으로 시작해서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과정에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행운동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동네다. 맞은편 샤로수길이 북적이는 동안 조용한 주거단지에는 젊은 직장인 위주로 1인가구가 늘어나며 최근 작고 개성 있는 가게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어진 일을 하기보다 자신의 취향과 리듬에 맞게 일하려는 사람이 모인 것이다. 아직 상권이 크지 않고 무언가 만들어보는 단계라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간다.
다른 서점에서는 보기 힘든 제목들이 눈에 띈다. 내가 좋아하는 솔, 필름생활 안내서, 문단 아이돌론, 영화기록장 같은.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스크랩하고 나의 취향을 공부하는 이야기다. 그것을 책으로 엮든, 짧은 글에 담든, 노트에 기록하든. 관심 있는 것이 생기면 눈이 뻑뻑해지도록 검색하고 탐닉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이 공간을 만든 사람도 그런 캐릭터가 아닐까. 자세히 보니 소품 하나에도 개인적인 취향이 묻어있다.
이렇게 색깔이 선명한 공간을 만든 그는 어떤 리듬으로 일을 하는 걸까. 책방 업무는 얼핏 여유로워 보이지만 자잘한 일거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회계, 고객 응대, SNS 운영, 청소, 책 입고, 프로그램 기획, 하물며 포스터 제작까지, 전부 혼자 하려면 문제 없이 굴러가도록 유지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을 텐데.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일이 많을 때 가장 편한 선택은 업무시간을 늘리고 체력을 깎아서 어떻게든 해내는 것이니까. 자꾸만 무리해서 일을 완성시키는데 한계를 느끼던 참이었다.
김소정 대표는 ‘얼마 전 동생에게 책방을 맡기고 오픈 반년만에 처음 친구들과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아프다는 이유로 문을 닫은 적이 없던 건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은 프로그램 하나도 내가 기획한 일이고, 어떤 책을 입고할지 결정하는 일 역시 온전히 나의 선택과 책임이라고 생각하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됐다고.
정작 힘든 순간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일은 정말 힘들면 미룰 수 있지만 사람을 응대하는 건 미룰 수 없으니까. 친한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다가도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3-4시간씩 대화를 나누는 일이 벅찰 때도 있었다고. 유난히 손님이 많았던 하루의 퇴근길에는 에너지가 소진된 느낌마저 들기도 했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일의 리듬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어쩌면 이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감정의 양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관리하는 것. 기분이 곧 태도가 되기는 너무 쉽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료와의 소통이나, 일을 대하는 자세나, 충분히 마음을 쏟지 못해서 생기는 실수는 감정을 다치게 만들었다. 일을 그르친 것보다 회복하기 힘든 잘못이었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감정 게이지가 떨어진 순간에는 어떻게 하냐고. 그는 손님이 되어 주변의 도서관이나 조그마한 가게를 찾아간다고 말했다. 특히 도서관은 모두가 책 자체를 여유롭게 즐기는 분위기가 있어 자연스레 빠져든다고. ‘내가 만들고 싶었던 분위기도 이런 거였지’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맴도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 그 감각이 스스로를 다잡고 일의 리듬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감정적으로 지쳐있을 때 무엇이든 잘 만들어진 것들을 보고 나면, 단순히 괜찮다는 위로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저렇게 하고 싶었어’라는 지향점이 뚜렷해지니까. 힘든 순간은 언제든지 찾아온다. 그럴수록 더 멋있게 해내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 처방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무실에서 들리는 전화벨 소리나 동료 간의 대화 같은 작은 소음에도 금방 몰입이 깨지는 스스로를 목격하곤 한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연히 집중이 잘 되는 순간이 찾아와도 그것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리듬을 다시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그래서 몸이 힘든 순간에도 좋은 글을 읽고 좋은 공간을 의식적으로 찾아가 어떻게 만들었을지 관찰하고 음미하려고 한다. 생각해보면 오래 장사를 한 음식점일수록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움직인다.
어떤 종류의 일이든 좋은 리듬이란 결국 그 태도가 분위기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것을 힘껏 좋아한다는 엠프티폴더스의 분위기를 즐겼던 순간도 후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언젠가 나의 리듬이 깨진 순간에(다음편에 계속).
INFORMATION
서울 관악구 행운1길 70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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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진성훈
sh.jin@gongshall.com